DSM5 진단 기준만으로 내 상태를 알 수 있을까요?

병동과 건강검진센터에서 18년 동안 일하며 자주 들은 말이 있습니다. “잠을 못 자고 기운이 없는데, 검색해 보니 우울증 기준에 맞는 것 같아요.” 반대로 일상이 무너질 만큼 힘든데도 증상 개수가 모자란다며 진료를 미룬 분도 있었습니다. 두 경우 모두 인터넷의 기준표만으로 답을 내리기는 어렵습니다.
DSM5 진단 기준은 무엇을 보는 걸까요?
DSM-5는 미국정신의학회가 만든 정신질환 진단 체계입니다. 현재는 내용을 개정한 DSM-5-TR도 사용합니다. 흔히 검색하는 ‘DSM5 진단 기준’은 모든 정신건강 문제에 적용하는 하나의 점수표가 아닙니다. 질환마다 살피는 증상과 기간이 다르고, 증상이 생활에 미치는 영향도 함께 봅니다.
예를 들어 잠을 못 잔다는 말만으로 원인을 알 수는 없습니다. 걱정 때문에 잠들기 어려운지, 통증으로 자주 깨는지, 잠을 적게 자도 피곤하지 않을 만큼 들떠 있는지에 따라 의사가 확인할 내용이 달라집니다. 같은 증상이라도 언제 시작됐고 이전의 자신과 얼마나 달라졌는지가 중요합니다.
미국정신의학회도 증상 설문을 진단을 돕는 자료로 설명합니다. 설문 결과 하나가 진단 자체는 아닙니다. 온라인 자가검사에서 높은 점수가 나왔다면 겁먹기보다 상담할 이유가 생겼다고 받아들이는 편이 좋습니다.
우울감은 ‘2주’만 채우면 진단될까요?
우울증을 예로 들면 숫자의 역할을 이해하기 쉽습니다. 주요우울삽화의 기준에는 같은 2주 동안 이전과 달라진 증상 5가지 이상이 포함됩니다. 그중 적어도 하나는 우울한 기분이나 평소 즐기던 일에 대한 흥미·즐거움의 감소여야 합니다. 수면과 식욕의 변화, 피로, 집중력 저하, 심한 죄책감 등도 확인합니다.
그런데 ‘2주’는 진료를 신청하기 전까지 기다려야 하는 날짜가 아닙니다. 며칠 사이에도 식사를 거의 못 하거나 출근과 돌봄이 어려워질 수 있습니다.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든다면 증상 개수를 세거나 2주가 지나기를 기다릴 일이 아닙니다. 미국 국립정신건강연구소도 증상이 심하고 일상에 영향을 주면 전문가의 도움을 받도록 안내합니다.
반대로 2주 넘게 힘들었다고 해서 모두 같은 진단이 내려지는 것도 아닙니다. 의사는 증상의 강도와 경과를 듣고, 다른 원인이나 과거에 지나치게 들뜨고 활동량이 늘었던 시기가 있었는지도 확인합니다. 진단 기준은 이 과정을 빠뜨리지 않도록 돕는 도구입니다.
진료실에서는 왜 몸 상태와 약까지 물을까요?
검진센터에서도 피곤함과 집중력 저하를 호소하는 분을 만납니다. 이런 증상은 마음의 문제와 함께 나타날 수 있지만, 몸 상태나 복용 중인 약의 영향도 살펴야 합니다. 미국 국립정신건강연구소는 일부 약물과 갑상선 질환 등이 우울 증상과 비슷하게 보일 수 있다고 설명합니다. 그래서 최근 검사 결과와 복용 약, 건강기능식품까지 의료진에게 알려주는 것이 도움이 됩니다. 임의로 약을 끊지는 마세요.
진료 전에는 진단명을 맞히려 애쓰기보다 변화를 적어 두면 좋습니다. 증상이 시작된 날, 잠자는 시간, 식사량, 학교나 직장에서 어려워진 일, 복용 약의 변화 정도면 충분합니다. 가족이 먼저 알아챈 변화가 있다면 그것도 전할 만합니다. 특히 잠을 거의 자지 않는데도 에너지가 넘치고 말과 활동이 눈에 띄게 늘었다면 꼭 이야기해야 합니다. 우울감만 말해서는 놓칠 수 있는 경과이기 때문입니다.
기준에 딱 맞지 않는다는 이유로 고통이 사라지는 것은 아닙니다. 미국정신의학회의 DSM-5-TR에는 전형적인 우울삽화의 증상 수나 기간을 채우지 못해도, 고통이나 기능 저하가 뚜렷한 상태를 평가할 수 있는 범주가 있습니다. 스스로 기준 밖이라고 판단해 도움을 포기할 필요는 없습니다.
이럴 땐 진료를 받으세요
우울감, 불안, 불면이 이어지거나 점점 심해지고, 일·공부·식사·대인관계에 지장이 생긴다면 정신건강의학과나 가까운 의료기관에서 상담받으세요. 기간이 2주보다 짧아도 생활이 크게 흔들리면 기다리지 않는 편이 좋습니다. 혼자 설명하기 어렵다면 적어 둔 증상 기록을 보여줘도 됩니다.
자해하거나 목숨을 끊을 생각이 들고 실행할 것 같다면 혼자 있지 말고 즉시 119나 응급실의 도움을 받으세요. 자살예방상담전화 109도 24시간 이용할 수 있습니다. 이런 순간에는 진단명이 무엇인지보다 지금 안전한지가 먼저입니다.
DSM5 진단 기준은 내 상태를 설명할 말을 찾는 데 도움이 될 수 있습니다. 다만 진료실에서는 기준표의 숫자 옆에 적히지 않은 생활의 변화까지 함께 듣습니다. 괴로움이 계속되거나 일상이 달라졌다면, 그 자체로 진료를 받을 충분한 이유가 됩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