폭염 예방 수칙, 물만 많이 마시면 충분하다고 생각하시나요?

검진센터에서 여름마다 자주 보던 장면이 있습니다. 멀쩡히 걸어 들어오신 분이 대기 중에 갑자기 식은땀을 흘리고, 혈압이 떨어지고, 다리에 힘이 풀리는 경우입니다. 본인은 그냥 더위를 좀 먹은 것 같다고 말하지만, 옆에서 보면 몸이 이미 위험 신호를 보내고 있을 때가 많습니다. 저는 진단하지 않습니다. 판단은 의사가 합니다. 다만 18년 동안 병동과 검진센터에서 본 경험으로 말씀드리면, 폭염 예방 수칙은 건강한 사람에게도 꽤 현실적인 안전장치입니다.
폭염은 기온보다 체감온도가 중요합니다
기온이 31℃라도 습도가 높고 바람이 없으면 몸은 훨씬 더 덥게 느낍니다. 땀이 나도 잘 마르지 않으면 체온이 내려가지 않기 때문입니다. 기상청의 폭염특보도 단순 기온만이 아니라 최고체감온도 33℃, 35℃ 같은 기준을 봅니다. 33℃부터는 야외 활동을 줄이고, 35℃ 안팎이면 일을 조금 남겼더라도 멈추는 쪽이 안전합니다.
병동에서 보면 온열질환은 꼭 공사장이나 논밭에서만 생기지 않았습니다. 에어컨이 약한 집, 창문을 닫은 방, 오래 주차된 차 안, 시장에서 장을 오래 본 뒤에도 생겼습니다. 특히 고령자, 영유아, 임신부, 심장질환·당뇨·신장질환이 있는 분, 이뇨제나 혈압약을 드시는 분은 같은 더위에도 더 빨리 지칠 수 있습니다.
물은 한 번에 많이보다 조금씩 자주가 낫습니다
폭염 예방 수칙에서 가장 먼저 나오는 것이 물입니다. 그런데 여기서 중요한 건 많이 마시는 것보다 자주 마시는 것입니다. 갈증이 난 뒤에 벌컥벌컥 마시면 이미 몸 안의 수분이 꽤 줄어든 뒤일 수 있습니다. 야외에 있거나 땀을 많이 흘린다면 15~20분마다 몇 모금씩 마시는 방식이 좋습니다. 소변 색이 옅은 노란색에 가깝다면 대체로 수분이 유지되고 있다는 신호로 볼 수 있습니다.
근데 모든 분에게 물을 무조건 많이 마시라고 말할 수는 없습니다. 심부전, 만성콩팥병, 투석 중인 분, 저나트륨혈증을 들은 적이 있는 분은 수분 제한이 필요한 경우가 있습니다. 이런 분들은 평소 주치의가 정해준 하루 수분량을 우선으로 봐야 합니다. 술은 탈수를 부르고, 카페인 음료와 당이 많은 음료도 더위 속에서는 부담이 될 수 있어 물을 기본으로 두는 게 좋습니다.
그늘과 휴식은 게으름이 아니라 예방입니다
폭염 때 쉬는 것을 민망해하는 분들이 많습니다. 특히 밭일, 배달, 주차 관리, 건설 현장처럼 일이 눈앞에 보이는 곳에서는 조금만 더 하자고 버티기 쉽습니다. 사실 그 조금만 더가 위험합니다. 질병관리청과 고용노동부 안내에서도 물, 그늘, 휴식을 온열질환 예방의 기본으로 강조합니다.
- 낮 12시부터 오후 5시 사이에는 야외 작업과 운동을 줄입니다.
- 헐렁하고 밝은색의 얇은 옷을 입고, 챙이 있는 모자를 씁니다.
- 야외에서는 최소 1시간마다 10~15분 이상 그늘이나 냉방 공간에서 쉽니다.
- 차 안에 아이, 어르신, 반려동물을 잠깐이라도 혼자 두지 않습니다.
- 실내가 32℃를 넘을 정도로 덥다면 선풍기 바람만 믿지 말고 냉방이 되는 곳으로 이동합니다.
에어컨이 부담스러워 계속 참는 분도 계십니다. 하지만 폭염이 심한 날에는 전기요금보다 응급실 비용과 몸의 손상이 더 커질 수 있습니다. 집이 너무 덥다면 주민센터, 무더위쉼터, 공공기관 같은 냉방 공간을 이용하는 것도 방법입니다.
이 증상은 쉬면 낫겠지로 넘기면 안 됩니다
온열질환은 처음부터 쓰러지는 모습으로 오지 않습니다. 두통, 어지러움, 메스꺼움, 근육경련, 심한 피로감, 평소보다 빠른 심장박동으로 시작하는 경우가 많습니다. 이때 바로 서늘한 곳으로 옮기고 옷을 느슨하게 하고, 의식이 또렷하면 물을 조금씩 마시게 해야 합니다.
열탈진과 열사병은 다르게 봐야 합니다
열탈진은 땀을 많이 흘리고 어지럽고 기운이 빠지는 상태로 시작하는 일이 많습니다. 반면 열사병은 더 위험합니다. 체온이 40℃ 안팎으로 오르거나, 말이 어눌해지고, 헛소리를 하고, 의식이 흐려지고, 경련이 생기면 응급상황입니다. 땀이 나는지 안 나는지만으로 안전하다고 판단하면 안 됩니다. 열사병은 생명을 위협할 수 있어 119가 먼저입니다.
의식이 흐린 사람에게 억지로 물을 먹이는 것은 위험합니다. 기도로 넘어갈 수 있습니다. 그럴 때는 시원한 곳으로 옮기고, 목·겨드랑이·사타구니 쪽을 차갑게 식히며, 가능한 한 빨리 응급 도움을 받아야 합니다.
이럴 땐 진료를 받으세요
폭염 뒤 어지러움이 반복되거나, 쉬어도 두통과 메스꺼움이 계속되거나, 소변량이 눈에 띄게 줄었다면 진료가 필요합니다. 근육통이 심하고 콜라색 소변이 나온다면 근육 손상과 관련된 응급 문제가 숨어 있을 수 있습니다. 당뇨가 있는 분이 폭염 뒤 혈당이 평소와 다르게 흔들리는 경우, 혈압약이나 이뇨제를 복용 중인 분이 갑자기 기운이 빠지는 경우도 그냥 넘기지 않는 편이 안전합니다.
폭염 예방 수칙은 대단한 기술이 아닙니다. 물을 가까이 두고, 더운 시간대를 피하고, 몸이 보내는 작은 신호에서 멈추는 일입니다. 여름에는 참는 사람이 강한 게 아니라, 제때 쉬고 도움을 요청하는 사람이 몸을 지키는 쪽에 가깝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