만성질환, 증상이 약해도 병원에 가야 할 때가 궁금하신가요?

건강검진센터에서 일하다 보면 결과지를 들고 와서 “저는 아픈 데가 없는데요”라고 말씀하시는 분이 많았습니다. 사실 만성질환은 처음부터 크게 아픈 경우보다 조용히 숫자로 먼저 보이는 경우가 훨씬 많습니다. 혈압, 혈당, 콜레스테롤, 신장 수치가 대표적입니다. 저는 진단하지 않습니다. 진단과 치료 판단은 의사가 합니다. 다만 18년 동안 병동과 검진 현장에서 보니, 병원에 갈 타이밍을 놓치지 않는 것만으로도 경과가 많이 달라졌습니다.
만성질환은 왜 늦게 알아차릴까요?
만성질환은 몸이 적응해 버리는 병이 많습니다. 혈압이 150까지 올라가도 두통이 없는 분이 있고, 공복혈당이 130을 넘어도 일상생활은 멀쩡한 분이 있습니다. 콜레스테롤이 높아도 당장 숨이 차거나 통증이 생기지는 않습니다. 그래서 “증상이 없으니 괜찮다”는 말이 제일 위험할 때가 있습니다.
병동에서 본 환자 중에는 몇 년 전부터 혈압이 높다는 말을 들었지만 약을 시작하지 않은 분도 있었습니다. 평소에는 아무렇지 않았는데 어느 날 갑자기 말이 어눌해지고 한쪽 팔에 힘이 빠져 응급실로 오셨습니다. 모든 사람이 그렇게 된다는 뜻은 아닙니다. 다만 만성질환은 오늘 불편하지 않아도 혈관, 콩팥, 눈, 심장에 천천히 흔적을 남길 수 있습니다.
결과지에서 먼저 볼 숫자는 따로 있습니다
검진 결과지를 볼 때 모든 항목을 같은 무게로 보기는 어렵습니다. 그래도 몇 가지 기준선은 꼭 봐야 합니다. 대한고혈압학회 기준으로 진료실 혈압이 140/90mmHg 이상이면 고혈압 범위로 봅니다. 집에서 잰 혈압은 보통 진료실보다 낮게 나오기 때문에 135/85mmHg 이상이 반복되면 상담이 필요합니다. 한 번 높게 나왔다고 바로 병이라고 단정하지는 않지만, 반복되는지는 꼭 확인해야 합니다.
혈당은 공복혈당 100mg/dL 미만이 정상 범위로 안내됩니다. 공복혈당이 100~125mg/dL이면 당뇨 전 단계로 보는 경우가 많고, 126mg/dL 이상이면 당뇨병 진단 기준에 들어갈 수 있습니다. 당화혈색소는 6.5% 이상일 때 진단 기준에 해당할 수 있습니다. 단, 감염, 스트레스, 약물, 검사 조건에 따라 달라질 수 있어서 의사는 보통 증상과 반복 검사, 다른 수치를 함께 봅니다.
콜레스테롤도 숫자 하나만 보면 헷갈립니다. 한국지질·동맥경화학회 안내에서는 LDL 콜레스테롤이 130mg/dL 이상이면 경계 수준, 160mg/dL 이상이면 높은 수준으로 봅니다. 그런데 당뇨병이 있거나 심장질환 병력이 있으면 목표 LDL이 훨씬 낮아질 수 있습니다. 그래서 옆집 사람과 같은 135mg/dL이라도 내 몸에서는 의미가 다를 수 있습니다.
증상이 약해도 넘기면 안 되는 신호
만성질환은 숫자로만 관리하는 병처럼 보이지만, 증상이 같이 나타나면 이야기가 달라집니다. 혈압이 높으면서 갑자기 심한 두통, 말 어눌함, 한쪽 팔다리 힘 빠짐, 가슴 통증, 호흡곤란이 생기면 기다릴 일이 아닙니다. 이런 증상은 응급 평가가 필요합니다.
혈당도 마찬가지입니다. 물을 유난히 많이 마시고, 소변을 자주 보고, 이유 없이 체중이 빠지고, 피로가 심해졌다면 검사를 미루지 않는 편이 좋습니다. 특히 식사와 관계없이 잰 혈당이 200mg/dL 이상이면서 이런 증상이 있으면 의료진 평가가 필요합니다.
- 혈압이 집에서 여러 날 135/85mmHg 이상으로 반복될 때
- 검진에서 혈압 140/90mmHg 이상이 반복될 때
- 공복혈당 126mg/dL 이상 또는 당화혈색소 6.5% 이상이 나왔을 때
- LDL 콜레스테롤 160mg/dL 이상이거나 당뇨병, 심장질환 병력이 함께 있을 때
- eGFR이 60mL/min/1.73㎡ 미만으로 나오거나 단백뇨가 확인될 때
- 갑작스러운 흉통, 호흡곤란, 마비, 의식 저하, 심한 어지럼이 있을 때
약을 먹기 시작했다면 중단이 더 중요합니다
솔직히 외래보다 병동에서 더 자주 보게 되는 문제가 “약을 괜찮아져서 끊었다”는 경우입니다. 혈압약을 먹고 혈압이 내려간 것은 병이 사라졌다는 뜻이 아니라 약이 일을 하고 있다는 뜻일 수 있습니다. 당뇨약도 수치가 좋아졌다고 바로 끊으면 다시 올라오는 경우가 많습니다.
특히 고혈압약, 당뇨약, 항응고제, 항혈소판제, 콜레스테롤약은 임의로 중단하지 않는 것이 안전합니다. 어지럽거나 속이 불편하거나 근육통이 생기면 약이 안 맞을 수는 있습니다. 그럴 때는 약 봉투나 처방전을 가지고 진료실에서 조절해야 합니다. 약을 안 먹는 선택보다 약을 바꾸는 선택이 더 현실적인 경우가 많습니다.
이럴 땐 진료를 받으세요
검진 결과에 빨간 표시가 하나 있다고 해서 겁부터 먹을 필요는 없습니다. 하지만 빨간 표시가 반복되거나, 가족력이 있거나, 흡연·비만·복부비만·수면무호흡 같은 위험요인이 같이 있으면 진료를 받는 쪽이 낫습니다. 특히 40대 이후에는 “이번 한 번만 높겠지” 하고 넘긴 수치가 다음 해에도 그대로 나오는 일이 흔합니다.
병원에 갈 때는 최근 검진 결과지, 집에서 잰 혈압 기록, 복용 중인 약 이름, 건강기능식품 목록을 같이 가져가면 진료가 훨씬 정확해집니다. 혈압은 아침과 저녁에 1~2주 정도 기록하면 도움이 됩니다. 혈당은 공복인지 식후인지 시간이 중요합니다.
만성질환 관리는 겁을 내서 시작하는 일이 아니라 내 숫자를 알고 속도를 늦추는 일에 가깝습니다. 몸은 생각보다 오래 버티지만, 한 번 손상된 혈관과 콩팥은 되돌리기 어려운 경우가 있습니다. 그래서 저는 증상이 없을 때 진료를 받는 분들이 오히려 가장 잘 대처하고 있다고 봅니다.
